“나는 미국과 유럽의 하늘도 보고 산길도 걸었으나 고국의 하늘, 고국의 길이 늘 그리웠다. 돌과 풀 사이 쇠똥에 발이 빠졌던 그 골목길이 그리웠다.”
“나의 작품은 내 밑바닥에 깔린 고향에 대한 시감이 원천이니 그것은 바로 나의 노래다.”
“작품 하나하나를 다시 보니 아직도 한 10년을 들고 고쳤으면 한다. 헨리 데비스 소로는‘창작의 원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반평생을 해외로 떠돌아다닌 나에게는 생일 명절 환갑도 없었으나 이 책으로 자축할까 하는 케케묵은 생각과 내가 가진 허영이 이 책을 내게 한다.”
17일 오후 전 외무장관 김용식과 소설가 김용익 선생의 주전골 생가(태평동 22번지)에 단편 소설‘꽃신’에 수록된 서문이 애절하게 낭송 되고 한국 현대사와 문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두 형제의 이름을 딴 ‘김용식·김용익 기념관’의 개관을 알렸다.
김용식 전 외무장관은 일제강점기에서 막 독립한 이 나라의 여러 외교적 과제들을 해결하며 대한민국 외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으며, 두 번의 외무부 장관과 한 번의 통일부 장관 그리고 세계 각 국의 대사를 역임하며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았으며 한국외교의 선봉장이었다.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가‘마술의 펜’이란 찬사를 얻으며 미국과 영국, 독일, 덴마크에 이르기까지 한국인 특유의 감수성을 주옥같은 영문 소설로 펼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한국인의 기상을 떨친 소설과 김용익. 그는 청렴과 근면의 표본이라는 또 다른 수식어를 달며 문학인으로 받았던 찬사도 부귀도 떨쳐버리고 평생을 주소도 신분증도 없이 살다 갔다.
두 형제의 이름을 딴 기념관은 이런 날을 예견하기나 한 듯, 정차 자신들은 먼 타국에 살면서도 피붙이 하나 살지 않은 고향 집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었고, 통영시의 뜻을 전해 들은 유족들은 이 생가를 기꺼이 기부채납 했다.
이후 유족들과 통영예술의 향기가 그동안 모아온 선생의 자료들을 기증하면서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전시실, 세미나실, 관리실 야외 휴게시설을 갖춘 기념관으로 조성 화려하지는 않지만 작고 아담하게 꾸며졌다.
이날 개관식에서는 김동진 통영시장과 김만옥 의장을 비롯한 시의원 그리고 문화예술계 인사와 시민들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유족으로는 김용식 전 장관의 딸과 사위 설원철 선생과 김용익 선생의 딸 김수영 씨와 사위 정운성 선생이 참석했다.
김동진 시장은 기념사에서“이 공간 속에 숨 쉬는 역사와 온몸으로 시대를 안고 간 선각자의 풍모는 엄청난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소박한 기념관 하나로 통영이 왜 통영일 수 있느냐 하는 의미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고 축하했다.
김용식 전 장관의 장남을 대신한 김용익 선생의 사위 정운성 선생은“이곳은 이제 아버지와 삼촌뿐 아니라 내 자손 대대로 저승에서도 그리울 우리 집안의 자랑이자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며 감사를 전했다.
두 형제의 기념관이 된 이 집에는 다섯 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두 형제의 아버지는 통영의 마지막 읍장을 지낸 김채호 옹이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아들을 데리고 여황산에 올라 두 아들이 이 나라에 쓸모 있는 장부로 자라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훗날 두 아들은 외교관과 작가로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었고, 아버지의 기도는 결국 이루어졌다.
허순채 통영문협 수필분과위원장이 꽃신의 서문을 낭송한다.
김혜숙 통영문협회장이 김용식선생의 회고록 일부를 낭송한다.
김용식 전 장관의 유족에게 김동진 시장이 감사패를 전달한다.
김용식 장관의 사위 설원철 씨가 유족인사를 하고 있다
김용식 선생의 사위 정운성 씨가 유족인사를 하고 있다
두타사 가릉빈가 합창단의 축가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