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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고 박경리 선생 서거 5주기 추모제 산양읍 양지공원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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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종수기자
작성일 13-05-0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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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빛 싱그러움이 대지를 물들인 55, 어린이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던 시각, 통영 산양읍 신전리 양지농원 기슭에는 고 박경리 선생 서거 5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걸음이 전국에서 이어졌다.
 

통영시와 통영문인협회는 박경리 선생 타계 5주기를 맞아 선생의 작품을 주제로 한 전국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독후감을 공모하는가 하면, 5일 선생께서 타계하신 날을 기해 산양읍 양지농원 묘소 일원에서 통영·거제·고성 청소년들의 백일장 대회와 영결식 장면 등을 담은 기록사진전 등 다채로운 추모행사를 열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토지문학관장과 사위 김지하 시인 그리고 강원 원주문인, 통영·고성문인과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해 선생의 문학적 업적과 생명사상을 기리며 1,000여개의 흑백 풍선을 띄어 선생을 추모했다.
 

김혜숙 통영문인협회장은 선생은 가셨지만, 이곳은 새로운 문학의 싹을 틔우는 산실로 소풍 같은 걸음으로 찾아와 백일장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선생님을 자랑하며 저마다의 꿈과 희망을 논하고 가는 자리가 되었다. 그 고귀한 인고의 세월들은 다시 우리들 가슴에서 새로운 성찰과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며 추모했다.
 

또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은 무슨 인연으로 이 자리에 함께 섰을까 여러분들과 저는 분명 내 어머니로 엮어지는 인연의 고리가 있을 것이다. 통영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정겨움과 어머니의 체취를 느낀다.”며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박경리, 그는 일본의 속국이었던 질곡의 시대와 전쟁의 폭풍, 독재의 폭정 앞에 힘겹게 한평생을 버티며, 보고 느낀 일들을 사기를 쓰는 심정으로 소설로 저술해 한국 문학사에 거름이 된 인물이다.
 

사소한 고난 한 자락도 비켜가지 않았던 그의 삶은, 민족의 애환을 대변하며 200855일 파릇파릇 새싹들의 꿈이 부풀던 날, 질풍 같은 삶을 접고 국토를 돌아온 끝없는 만장의 행렬을 따라 고향 땅, 통영 산양읍 양지농원 볕 바른 기슭에 누웠다.
 

그는 누가 뭐래도 통영의 여인이다.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났고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 1955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계산>1956년 단편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발표되면서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한다.
 

그의 주요 작품은 흑흑백백, 불신시대(不信時代), 암흑시대, 표류도, 파시(波市),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 노을진 들녘, 교수의 부인, 토지 등이 있다.
 

월탄문학상, 인촌상, 한국여류문학상, 내성문학상을 받았으며 1992년 보관문화훈장과 타계 직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그는 소설 '토지'의 집필에 들어가면서 "이전의 작품은 토지를 위한 습작이었다."고 말하며 평생을 바칠 토지의 서막을 알렸다.
 

1969년 시작된 그의 약속은 199425년에 달하는 혈투 끝에 5부의 대하소설을 우리에게 안겼다. 등장인물 700여 명, 50여 년에 걸친 순탄치 못한 우리역사를 담은 한국 현대문학의 대서사시로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도 번역됐고, 드라마로도 제작돼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처럼 그는 200550여 년 만에 고향 통영을 찾는다. 노구를 이끌고 서문고개를 둘러보며 젊은 날의 향수에 젖어 세병관 기둥에 기대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이순신장군을 가장 존경했고 이순신 장군을 철학으로 삼고 변함없는 세병관 기둥처럼 자신을 바로 세운 힘이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오래도록 고향을 찾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토로했다.
 

"토지를 쓰는 동안 집 밖 출입도 제대로 못 했다. 그동안 고향에 못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주변 인사치레를 다했다면 어찌 대하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내 생에 한 순간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 고향을 추억하며 글 쓰는 일은 외로움을 잊게 하는 친구가 돼줬고, 어린 딸을 부양해야 하는 밥벌이가 돼줬다. 나는 죽어서라도 고향에 뭔가를 베풀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생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2007년 폐암이 발견되면서 지키지 못했고 인간이 늙으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며 치료를 거부하고 토지를 완성하고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버리고 갈 것 들을 챙기며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3년 뒤 죽음으로 지켰다.
 

그의 삶을 보여주는 '박경리기념관'서거 이듬해 묘소아래 세워졌고, 아직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국의 걸음들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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