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경제 통영지역 출신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새로이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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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04-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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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지역 출신 10~20대 여성 10여명이 일본제국주의 당시 일본 나라현 텐리시 야나기모토 해군비행장 관할 안에 있는 군위안소로 동원되어 강제‘위안부’로 처해 있었던 사실이, 1970년대 초반당시 언론사 기자였던 가와세 슌지씨가 취재했던 노트를 통해 확인되었다.
통영지역 출신 10~20대 여성 10여명이 일본제국주의 당시 일본 나라현 텐리시 야나기모토 해군비행장 관할 안에 있는 군위안소로 동원되어 강제‘위안부’로 처해 있었던 사실이, 1970년대 초반당시 언론사 기자였던 가와세 슌지씨가 취재했던 노트를 통해 확인되었다.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꼐하는통여거제시민모인’은 가운데 10일 오후 2시 통영시 브리핑 룸에서 전 일본 나라신문 가와세 슌지 씨가 직접 기자회견에 참석하여 증언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가와세 슌지씨 태평양전쟁 말기 일존 나라현 덴리시에는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 남성들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들이 그들은 통영과 진주에서 강제동원된17세에서 26가량의 여성으로 그중에는 어린아이의 엄마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여성정신대란 이름으로 강제 동원되어 일본해군이 관리하는 한 공장 내에 설치된 위안소에 강제로 위안부 생활을 했으며 패전 후 방치되어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일본 나라(奈良)현 덴리(天理)시 당국이 지난 4월 중순경 시립공원에 세워져 있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역사를 설명한 안내판을 몰래 철거한 것도 이러한 사례의 하나라고 가와세 슌지씨는 주장하고 있다.
또한 당시에 오키나와에는 100여 곳의 위안소가 있었지만 대부분 민간인이 설치안 위안소 였지만 통영 진주에서 동원된 여성들은 일본 해군이 관리하는 공장에서 해군의 관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비행장 건설 강제 징용과 통영, 진주 위안부에 대한 사실은 1992년 강제 동원된 조선인 남성피해자 2명의 증언을 통해 위안부 실상이 드러났으며 증언자 강정시 씨(진주 출신, 당시 67세, 19세에 오사타해군으로 징용)에 의해 통영출신 위안부 피해사실을 나라신문 가와세 슌지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강씨의 증언과 가와세 슌지 씨의 증언에 따르면 특별 고등경찰이 협화회 회고간부에게 정신대로 여성 20명을 요구해 경상남도 2개소에서 정신대라는 명령으로 구장이 직접모집 해 통영여성 10명과 진주여성 10명으로 강제로 보냈으며 연령대는 17~26세로 그 중 24세 여성은 두 자녀를 둔 여성으로 종전 직후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사쿠라이 역에서 시모노세키호 가서 다시 부산으로 갔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이 여성은 통영군 출신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극한 상황에서 군사용 메틸알코올을 마시며 배고픔을 견디고 근처에 살던 제일조선인이 듣고 여성들을 구출하여 자기 동네에 약 1년간 숨겨주다가 이 중 한명은 병에 걸려 사망하여 강정시가 이여성의 고향인 통영으로 유골을 보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1975년 8월 일본 나라신문사 가와세 슌지 기자가 제일 조선인 강정시(진주출신 당시 67세) 씨와 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증언 취재. 취재노트를 보관해왔다.
1975년 덴리시 역사학자, 시민들, 야나기모토 군비행자에 강제 동원된 조선 징용인 남자 3천여명과 조선인 위안부 여성 20여명에 대한 역사를 조사 이 역사를 기록한 설명안내판(가로세로 60센티미터)를 덴리시 당국, 시교육위원회가 공동으로 시립공원에 설치했고 19년간 시민 학생들의 역사, 인권학습의 장으로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텐리시는 2014년 초 설명안내판에 적힌 애용은 날조한 것 이라는 메일이 덴리시에 접수되고 2014년 4월 덴라시 설명안내판 일방적으로 철수 했다.
2014 6월 텐리시야나기모토 비행장 설명안내판 철거를 생각하는 모임 명으로 철거이유, 경위질문서를 텐리시장 앞으로 발송, 7월 10일까지 회신을 요구했는데 덴리사장은 “언론사에 시당국과 시 교육위원회의 공식견해가 강제동원이하고 해석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정부가 연구하고 검증하기를 기다리겠다.”고 답하고 아직까지 원상 복구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가와세 슌지(川瀬俊治)씨는 1947년생으로 1971년 나라신문사에 입사해 1984년 행방출판사 편집인 2005년 프리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오사카경제대학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리쓰메이칸대학 객원 연구원, 덴리대학 강사 집단자위권 반대운동, 부락민차별철폐운동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저서로는 또 하나의 현대사서설 조선노동자와 대일본제국. 등이 있다.

특별기고/ 가와세 슌지(川瀬俊治)
태평양전쟁 말기 나라현 덴리시에는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 남성들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다.
야나기모토 비행장은 일본해군의 시설인데, 2차세계대전 중 일본이 본토에서 결전할 것에 대비해 2년여 간 공사를 하여 패망 직전에 완성한 것이다.
일제는 이 비행장 건설 공사에 3천여 명의 조선인 남성을 강제로 동원했다. 또 군의 관할지 내에는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 약 20명을 일본군 ‘위안부’로 혹사한 위안소가 설치돼 있다.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1995년 덴리시에 사는 시민과 역사학자, 사회운동가들은 힘을 모았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덴리시와 시교육위원회와 함께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기술한 안내판을 만들었고 시립공원에 이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올 4월 덴리시는 돌연 이 안내판을 철거했다. 20여 년간이나 세워둔 안내판을 4월 어느 날 몰래 치워버린 것이다. 왜 철거했냐고 묻자 덴리시는 “안내판에 대해 항의하는 메일을 몇 통 받았다”고 답변했다.
시 당국으로 온 민원 메일에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역사는) 오욕의 역사이다”,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을 써놓았다”는 의견이 쓰여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덴리시 당국은 “안내판에 쓴 내용은 시 당국의 공식견해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에 나라현의 시민운동단체들은 시 당국이 역사를 은폐했다고 규탄하면서 안내판을 원래대로 복구하여 시립공원에 다시 세우라고 요구하고 있다. 8월 7일에는 덴리시의 과거사 은폐를 규탄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도록 촉구하는 항의집회도 개최했다.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일본의 지자체가 직접 나서서 설치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로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여성 피해자에 대한 역사를 적은 안내판은 오직 덴리시에만 있었다.
1995년 이 안내판을 세운 후 지금까지 일본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덴리시 현지를 방문했다. 또 덴리시에 사는 주민이나 역사가가 관광객들에게 조선인을 동원한 일본의 가해역사를 설명을 하거나 고장을 안내할 때 도움이 되었다. 일본시민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일본의 역사를 직시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할 수 있다.
야나기모토 비행장은 어떤 곳이었는가? 이 비행장은 일본군 구해군인 ‘야마토(大和)해군항공대’의 기지였는데, 태평양전쟁 때 오사카 해군시설부가 ‘오바야시구미(大林組, OBAYASHI CORPORATION ; 건설회사)’에 공사를 발주하여 1943년 9월부터 비행장 공사에 들어갔다.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까지 1,500미터에 이르는 활주로 등을 닦았다. 비행장의 정식명칭은 ‘야마토(大和)해군항공대 야마토기지’인데,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소재지 지명을 따서 야나기모토 비행장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군은 전쟁 당시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공사에 근로봉사란 명목으로 덴리시에 살던 일본인 학생과 주민을 동원하였으며, 노동력이 부족하니 보충해야 한다며 조선인 남성을 강제동원했다.
게다가 경상남도에서 조선인 여성을 동원하여 야마토해군의 관리구역 안에 설치한 위안소에 가둬놓고 ‘성노예’로 삼았다. 조선인 남성과 여성은 도망갈 수조차 없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해군과 오바야시구미는 그나마 조선인 남성은 오사카에서 열차를 태워 부산과 연락선이 있는 시모노세키까지 보냈지만, 위안부로 삼았던 조선인 여성은 그대로 방치했다.
그런데 문헌자료가 일체 남아 있지 않아 그간 야나기모토 비행장에 있던 위안소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강제동원 피해자들 가운데 다섯 명이 증언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위안부’로 끌려온 여성은 20명 남짓이었는데, 극한상태에서 군사용 메틸알코올을 마시며 배고픔을 견디었다. 근처에 사는 재일조선인 남성이 이 소식을 듣고, 여성들을 구출하여 자기가 사는 동네에 약 1년간 숨겨줬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은 결국 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이 재일조선인 남성이 숨진 여성의 고향 경상남도 통영으로 유골을 보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필자가 1970년대 초반에 저널리스트로 일할 때 직접 이 재일조선인 남성을 인터뷰해 증언을 들은 것이다. 참고로 통영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여성이 가장 많은 지역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편, 강제동원된 조선인 남성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직까지 다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이 패전한 후 군이 관련서류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2년에 우연히 충청남도 논산에 사는 두 사람이 강제동원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연락을 취했고, 그 해 가을에 그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와 피해사실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그 후에는 한국정부가 진행한 강제동원피해자조사 결과를 보고 방한해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공사 강제동원피해자 4명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간 문헌자료가 멸실된 가운데서도 필자를 포함해 덴리시에 사는 시민운동가, 역사학자들은 계속해서 피해자를 만나 증언을 정리하여 역사의 공백을 메우고자 노력해 왔다. 이렇게 장기간 조사를 계속해온 성과를 반영한 것이 바로 안내판이었다.
지난 1995년 안내판을 시립공원에 설치한 뒤, 19년간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역사학습, 인권학습의 장으로 활용해왔다. 가로세로 80㎝에 불과한 작은 안내판이지만 그 역할은 매우 크고 소중했다고 본다.
갑작스런 안내판 철거소식을 들은 일본의 시민사회는 덴리시에 있는 지역의 시민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야나기모토 비행장 안내판 철거를 생각하는 모임’을 꾸려, 시 당국에 안내판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라고 요구했다. 또 덴리시 시장에게 철거경위를 밝히라는 질의서를 보냈다.
그러자 덴리시는 7월 9일자 답변서에서 “역사인식이 다양할 수 있는데, 시의 견해로 강제성을 밝히는 것은 부적당하다”면서 “일본정부가 역사연구를 하고 검증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한 마디로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가해의 역사를 부정한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은폐하는 배경이 도대체 무엇인지 덴리시 당국에 묻고 싶다.
아마도 덴리시 당국이 안내판을 철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베 정권의 방침일 것이다. 2007년 1차 아베정권은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사료) 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강제연행 사실을 무시한 바 있다.
조선을 비롯해 아시아를 침략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은폐하려는 ‘역사수정주의’의 마수가 이제는 지자체로까지 뻗치고 있다. 더욱이 “일본정부가 역사연구를 하고 검증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 답변을 볼 때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정부가 표방하는 역사관을 이제 지자체도 군말 없이 그대로 따르겠다는 게 현재의 실상이다. 일본의 시민들은 이런 사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앞으로 ‘야나기모토 비행장 안내판 철거를 생각하는 모임’은 이러한 일본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을 끈질기게 추진할 것이다. 아시아 민중과 함께 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꼭 찾도록 하겠다.
이 운동에는 일본에서는 ‘나라지역 역사를 발굴하는 모임’, ‘나라지역 다문화 공생 포럼’ 등 크고 작은 50여개 단체, 한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해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가 함께 하고 있다. 한국의 뜻있는 시민들이 더 많이 지지 성원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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